VISITING/MASIL

살아있는 인왕재색도를 볼 수 있는 수성동 계곡과 더 숲 초소책방

d0u0p 2023. 11. 7. 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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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우 즐겁고 건강한 날이었다. 초소 책방을 한참 전부터 가보겠다고 벼르고 있었는데 드디어 길을 나섰고, 포털 지도 앱에서 알려주는 길 중 마음에 드는 길은 시청 역에서 내려서 프레스센터 앞에서 마을버스를 타는 경로였다. 프레스센터 앞에서 마을버스까지는 잘 탔는데, 그 마을버스는 지도 앱에서 하차하라고 안내하는 역까지 가지 않았다. 버스 번호를 착각했는지 어디서부터 잘못된건지 모를 일이다. 일단 마을 버스가 종점에 도착해서 모두 다 내리는 것 같은 분위기라 눈치를 보고 있었더니 기사님이 얼른 내리라 말씀까지 하셔서 어쩔 수 없이 일단 내렸고 눈 앞에는 가파른 언덕길과 함께 겸재 정선이 그려냈다는 인왕 재색도와 흡사한 산봉우리가 나타났다.

다시 마을 버스를 타고 다른 경로를 찾아 가려니 경치가 너무 좋기도 하고 날씨도 너무 좋아서 일단 수성동 계곡 입구인 이곳에서 카페까지 가는 길을 찾아보기로 했다.

지도는 오묘한 곡선을 그리며 길을 안내하고 있는데, 등고선 표시는 없으니 경사가 얼마나 가파른지 확인할 길이 없었고 결국 몸으로 직접 확인해야 했다. 원래 내렸어야 했던 정류장이 윤동주 문확관이었는데, 프레스 센터 앞에서 집어 탄 버스는 그 반대에서 내려준 느낌이었다. 수성동 계곡 안 쪽 길로 가자니 정말 이 길이 맞을까, 저 길의 끝에 카페가 나온다는 말인가, 끝없는 의구심에 휩싸이기 시작했고 카페로 가는 큰 길이 더 이상 나타나지 않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 때 쯤 계곡 그늘 아래에서 열심히 숙제를 하는 대학생일 법한 무리를 만나 오히려 마음이 놓였다. 뱀 나올 걱정을 하며 산책길에 나서던 유치원생 어린이들 외에도 사람이 다니는 곳이구나 싶었고, 그들은 무려 그림을 그리고 있었는데  비록 과제라 어쩔 수 없는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이라 할지라도 그 젊은 시간이 부러워졌다. 더불어 크로키 숙제가 너무 하기 싫어서 징징댔던 그 옛날도 다시 떠올랐고 그 때 더 열심히 할 걸 그랬다 싶기도 하고 지금이라도 다시 크로키북을 들고 길을 나설 결심을 해보기로 했다. 추워지기 전에 한 번이라도 스케치북 가볍게 들고 어디라도 길을 나서봐야겠는데, 지금도 아이패드와 키보드만 달랑 챙겨들고 나와있다. 스케치북까지 챙길 여력이 없다. 한약을 더 먹어야 할까. 일을 안하고 매일 쉬면 하루는 그림, 하루는 글, 하루는 운동으로 꽉꽉 채워 살 것 같기는 한데 막상 쉬면 그냥 누워만 있고 싶어서 전투적으로 무엇 하나도 해내기가 어렵다. 정말 체력의 문제일까, 정신력의 문제일까 진심으로 궁금하다.

계곡을 벗어나면 산등성이로 이어진 가파른 언덕길이 있는데 가을 날씨라고 하기에는 너무 따뜻한 날이라서 도톰하지는 않았지만 셔츠 위에 겹쳐 입은 니트가 너무 버겁게 느껴졌다. 땀을 삐질 삐질 흘리며 언덕 중간 쯤에 도착하니 서울 시내를 내려다볼 수 있는 무무대 전망대가 있었다. 언덕길에서 전망대 입구까지 자연스럽게 연결돼있어서 잠깐 경치를 감상하고 내려오면서 파노라마를 찍기로 하고 다시 카페를 찾아 올라갔다.

전망대에서 보이는 것 보다는 시내가 훨씬 덜 보이는 편이지만시원한 아메리카노 한 잔 놓고 땀을 식히며 서울 시내를 내려다 보고 있으니 감개가 무량했다. 맙소사. 커피 맛도 지난 번 들렀던 채그로와는 달리 아주 좋았다. 자주 찾아가도 만족스러울 맛이었다.

적당히 눈부신 햇살 아래에서 시간을 보내다 다시 그늘을 찾아 앉았다. 아이패드를 꺼내 들고 풍경이고 뭐고 코스모스의 수술 형태에 집착을 하려니 눈부신 햇빛이 부담스러웠다. 소나무 그늘 아래에서도 한참동안 코스모스 수술에 집착하다가 미처 완성은 하지 못하고 배가 고파서 그림을 접고 내려와야했다. 초소책방은 베이커리도 겸하고 있어서 빵이라도 한 입 하면 괜찮았겠지만, 아침도 가볍게 빵을 먹고 나섰는데 점심도 빵으로 가볍게 먹을 수는 없었다.

돌아 내려오는 길에 무무대에서 한참을 파노라마를 찍고 마침 구름이 도와주는 날이라 구름 뒤에 빛나고 있는 태양까지 사진에 담을 수 있었다. 점심 시간 쯤 되니 올라오시는 분들이 제법 많아졌다. 중턱을 조금 지나 내려가는 길에서 올라올 때 그 길 근처 딱 그 자리에서의 내 표정과 거의 똑같을 법한 표정으로 ‘이 길로 가면 초소 책방이 나오는 건가요?’라며 같은 의문을 품고 계시는 분을 만나 반 쯤 더 올라가시면 된다고 말씀드렸다. 다 왔다고 말씀드리지는 않았지만, 내려오는 입장에서는 정말 다 온 지점이기는 했다.

이제는 정말 다 내려온 지점에서 걷기 좋은 마을길을 안내해 놓은 표지판을 한참 들여다 보았다. 배가 고파서 더 걸어 내려가고 싶지는 않아서 얼른 마을버스를 타고 프레스센터 앞으로 돌아왔다. 마을버스는 정말 좁은 마을 골목길로 아슬아슬하게 운행하고 있어서 오히려 더 스릴 넘치고 재미있었다. 오전 방문도 나름 좋았지만 다음에는 그 근처 점심 맛집을 일단 찾아 들렀다가 올라가야겠다. 벌써 2주나 지나서 단풍 구경을 또 하러 갈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잊지 말고 꼭 부지런 떨어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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