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ATING

낮술과 함께 한 삼일절

d0u0p 2019. 3. 13.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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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일절을 전후로 과하게 먹고 마신 후 살이 쪘다. 삼일절 전 낙지볶음과 삼겹살 회식으로 이미 든든히 먹어두고, 삼일절에는 도통 여유라고는 없는 피로에 쩔어 사는 직장인들끼리 간만에 모여 낮술과 함께 하는 여유로운 시간을 갖기로 약속했다. 물론 내 몸에는 아세트알데하이드를 분해하는 능력이 거의 없어서 과하게 음주를 하지도 못하고 한약도 먹기 시작했기 때문에 음주는 할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그 여유는 함께 즐길 수 있으니까 기꺼이 동참했다. 

게다가 삼일절 오전에는 조카와 함께 해리포터 비밀의 방을 4DX로 관람하기로 하여 여유로우면서도 바쁜 날이었다. 일찌감치 극장에 가서 벌써 19년 전 영화가 되어 버린 해리포터를 재미있게 보다가 잠깐 졸았다. 뱀 나오는 지하 장면에서 졸았는데 19년 전에도 왠지 그 장면에서 졸았을 것 같다. 이번에는 조카가 "주무세요?"라며 깨워 주었고, 한창 조용한 그 장면에서 주변 모든 관람객들이 내가 자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어 버렸다. "아니야, 보고 있어."라고 조용히 대답했다. 진짜 보고 있었다. 어두운 지하에서 뱀이 나와 싸우고 있으니까 피로해서 눈이 감겼을 뿐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때의 톰 리들의 얼굴이 비밀의 방에서 톰 리들 역할을 했던 그 사람의 얼굴이 아니라 마법사의 돌에서 보았던 볼드모트의 얼굴이었던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이 드는데, 못 본 것이었나, 본 것이었나 잘 모르겠다. 

뭐, 영화를 잘 보고 조카를 인수인계한 뒤 이태원으로 향했다. 다행히도 친구들도 모두 조금씩 늦은 상태여서 별 걱정 없이 늦게 도착해도 괜찮았다. 

1차 : VATOS 바토스, 스페인어는 어렵다.  

멕시코 요리가 주로 안주로 구성되고 다양한 칵테일과 맥주가 있는 곳이다. 이미 친구들은 허브가 가득한 모히또와 맥주를 마시고 있었고, 잠시 대기 후에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특별히 가고자 했던 곳은 아니지만 급하게 장소를 변경하여 오라길래 아무 생각없이 갔었는데, 같은 건물에 교회가 있고, 교회 건물에 있는 술집이었다. 대낮인데도 만석이라 대기했어야 했는데, 대기 중에도 음료를 미리 주문할 수 있고, 편히 앉아 기다리는 곳이 따로 마련되어 있었다. 친구들은 대기석에서 이미 한 잔 씩들 하고 계신 것이었다.  

​간단하게 마시고 일어날 요량으로 매콤한 치킨 타코를 주문하고 자리토스인지 야리토스인지 하리토스인지 알 수 없는 브랜드의 자몽 음료수를 주문하려 하니, 서빙하시는 분이 하리토스라고 받아 주셨다. 다양한 인종의 종업원이 섞여 있는데 대부분 한국어로 주문 받으신다. 간혹 영어만 하시는 분들도 있다긴 하는데 삼일절에는 다행히 한국어 하시는 영미권 서버님이 주문을 받아 주셨다. 추가로 친구가 브루어리 맥주를 주문했는데, 소원이라는 맥주였다. 다른 맥주들보다 특히 더 향긋한 느낌이 있어서 따뜻한 봄 바람 부는 날 야외에서 마시기 좋을 것 같다. 


2차 : 요리가 있는 섬, 나는 육회가 싫다.  


육회를 먹지 않지만 그래도 친구가 좋아 하니 주문했다. 회는 잘 먹으니까, 육회가 핏물 밴 날고기라서라기 보다는 고기에 배어 있는 소기름의 냄새가 싫어서 잘 안 먹는 것일 뿐이다. 고깃국도 어지간하면 잘 안 먹는 편인데 언젠가 처음 육회에 도전했을 때 고기의 맛이나 질감 보다는 싫어하는 그 기름 냄새가 먼저 와 닿았기 때문에, 육회란 기름 냄새가 나는 음식이구나, 이제 먹지 말아야지 결정했던 것이다. 산낙지와 함께 나와서 버무리기 전에 산낙지를 따로 건져서 먹고, 나중에 맛을 보기는 했는데, 전에 먹었던 그 때의 느낌보다는 기름 냄새가 덜하긴 했다. 양념된 육회는 익히지 않은 불고기 맛과 비슷했다. 조금 덜 달았으면 몇 입 더 먹었을 것 같다. 

당연히 육회만 먹을 수 없으니까 해산물 모둠을 함께 주문했고, 신선한 해산물과 함께 막걸리를 즐겼다. 다른 술 보다 사실 막걸리가 조금 더 잘 넘어 간다. 숙취 때문에 힘겨울 정도로 마시지 않아서 그 고난의 끝을 몰라서 그런가 일단은 막걸리가 좋다. 지평 막걸리를 주문하려 했는데 못 했다. 그냥 장수 막걸리도 괜찮았다. 


2.5차 커피, 이제 아무데나 가지 말자.  

막걸리를 한 잔 씩들 한 후 진한 커피가 한 잔 하고 싶다 해서 밖으로 나섰는데, 의외로 눈에 보이는 커피집이 없었고, 자리도 없었고, 추웠고, 대충 자리가 있어 보이는 곳에 들어갔다. 원래 찾던 진한 커피와는 거리가 먼 멀겋고 싱거운 커피를 받아 들고 헌 가구 위에 앉아 수다를 떨다 배가 고파졌을 때 일어났다. 

3차 : 양념 갈비의 오래된 한 풀이, 종점 숯불 갈비

오랜 만에 쟈니덤플링 앞 골목을 지나 사거리로 나와서 택시를 타고 종점 숯불 갈비로 이동했다. 생각 없이 따라다니기만 하니 좋았다. 김선생은 어떻게 알았는지 우리를 맛집으로 인도하여 주었다. 고독한 미식가가 최근에 한국에 들렀을 때 방문한 곳이라고 한다. 어느 어느 식당에 갔는지 눈 여겨 보지는 않았지만, 왔다 간 것 정도는 기억하고 있었던 터라 반가웠다. 그는 어떤 음식을 한국 음식이라고 생각하고 먹고 갔을까 궁금했다. 

각 종 반찬 중 으뜸인 것은 김치와 멸치였다. 파김치와 배추김치가 푹 익어 전형적인 한국 시골 밥상의 맛을 내고 있었고, 멸치는 그야 말로 딱 한 번 사무실 근처 식당에서 만났던 눈동자가 동그랗게 살아 있는 감칠 맛 넘치는 멸치였다. 

​앞으로 이렇게 눈이 돈그란 멸치를 만나면 꼭 맛을 봐야겠다. 내가 멸치를 좋아하는 줄은 몰랐는데, 멸치를 좋아하나 보다. 맛있게 먹었다. 고기를 주문하면서 밥과 찌개도 함께 주문했는데 거리낌 없이 된장 찌개를 주문하고 나니 이내, 김선생이 그제서야 김치 찌개가 좋았던 것 같다고 한다. 밑반찬의 김치 맛을 보니, 찌개가 정말 맛이 없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찌개가 두 그릇이면 어떠랴, 김치 찌개도 추가 주문했다. 진짜 너무 맛있는 인생 김치찌개를 만났다. 김치찌개 국물 한 방울 남김없이 다 먹었다. 밥이 모자랄 지경이라 밥도 추가 주문했다. 지금 봐도 다시 또 먹고 싶다. 

메인 메뉴인 돼지 갈비는 고기의 질은 그냥 그럭저럭이고, 양념이 나쁘지도 않고 좋지도 않은 정도였는데, 달지 않아서 좋았다. 달지 않은 양념이 최대 장점이라고 생각한다. 양념이 덜 달면 질리지 않고 고기를 더 먹을 수 있지 않나? 게다가 이런 김치 찌개와 파김치가 함께라면 위장이 작은 내 자신을 탓하며 아쉬워하게 된다. 

위치가 진짜 너무 애매해서 집에 올 때는 그냥 택시를 탔다. 날씨도 약간 추웠고 길도 모르고 버스도 없는 외진 곳이었다. 가게 이름조차도 종점 숯불 갈비인 걸 보면 외진 곳임이 분명하다. 그래서인지 식당 안이 너무 시끄럽거나 부산스럽지도 않고 딱 좋았다. 숯불이 난무하고 술잔이 오가는 만석인 식당인데도 불구하고 여유로웠다. 

택시에 올라 타자 마자 기사님이 종점 숯불 갈비에서 나오셨냐며 물으신다. 이 자리에서 타는 손님은 대 부분 그 집에서 나오는 거라시며 맛있냐 물으신다. 갈비도 갈비지만 김치찌개는 너어어어어어무 맛있다고 내 집인 거 마냥 부끄럽게 자랑해 드렸다. 침 고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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