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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리녹스가 필요한 이유

d0u0p 2022. 11. 9.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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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에 길을 나서면 찾아갈 수 있는 동네 별다방 네 군데 중 그 어디에도 내가 앉을 자리는 없다. 커피 한 잔 마시려고 주말인데도 새벽 바람에 길을 나설 수는 없으니까 점심을 먹고 나서는 편인데, 그 어디에도 내 자리는 없다. 별다방 뿐만이 아니라 거의 모든 커피숍에는 늘 자리가 없었다. 그래서 결국 나만의 자리를 만들기 위해 캠핑용 의자를 하나 샀고, 이제는 동네 공원 한 쪽 잔디밭 꽃사과 나무와 자작나무 그늘 아래에서 책도 읽고 그림도 그릴 수 있게 되었다. 차마 집에서 공원까지 캠핑용 웨건에 커다란 접이식 캠핑 의자를 넣어 끌고 가고 싶지는 않아서 찾아 보니, 백패킹까지 가능한 조립형 헬리녹스 택티컬 체어가 있었고, 접었을 때에는 백팩에 넣어서 공원까지 걸어가는 데 문제가 없을 것 같아 덥썩 구매하기로 했다. 

꽃사과나무 옆에 자리를 잡고 이북 리더를 켰다. 사실 와이파이가 없으면 대출한 책도 읽기 어려운 상황이라 고민을 하긴 했었는데 일단 앉아 와이파이를 열어 보니 서울시 공공 와이파이를 사용할 수 있어서 신이 났다. 

높은 가을 하늘에, 푸른 잔디 위에 앉아 한참동안 책을 읽을 수 있으니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처음 도전해 보는 일이라 딸랑 의자 하나와 이북 리더만 들고 갔던 탓에 발 밑에 떨어진 낙엽이며 꽃사과 열매를 그림으로 옮길 수는 없었고, 눈으로 구경만 하다 돌아와야 했다. 

처음 의자를 조립할 때에는 설마 불량품일까 의심스러울 정도로 조립이 힘들었는데, 막상 나가서 조립을 하니 크게 어렵지는 않았다. 커버가 정말 안들어 갈 것 같다는 믿음은 버리고, 이 폴은 부러지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체중을 실어 폴을 누르면 커버에 쏙 들어간다. 의자를 구매하면서 방한용 커버가 눈에 띄었을 때, 굳이 또 뭘 추가할 필요가 있겠느냐며 가볍게 지나갔는데 막상 딱 한 번 두 시간 남짓 앉아 있는데도 불구하고 허리춤으로 치고 들어 오는 한기를 제대로 만끽할 수 있었으니, 방한용 커버를 또 사지 않을 수 없었다.

주말이 끝나고 바로 출근하자 마자 방한용 커버를 구매하고, 동가홍상이라며 커피도 한 잔 올려 놓고 물감도 올려 놓을 수 있는 사이드 테이블도 구매했다. 

발가락 하나 꼼짝하기 싫은 주말이 돌아 왔지만, 가을은 짧으니 바로 다음 주 주말에 기운을 내서 다시 공원을 찾아 갔다. 마침 공원 한 쪽에서는 행사가 열려서 북적댔지만 자작나무 그늘 아래 잔디밭은 여전히 여유롭고 좋았다. 잠깐 책을 읽다가 발 밑에 떨어진 자작나무 잎을 하나 집어 들고 수채화를 시작했다.  

스케치를 뭘 재고 어쩌고 하지 않고 마른 잎이라 그대로 얹어서 외곽선을 따라 그려줬더니 너무 쉽고 편해서 좋았다. 새로 구매한 아갈로 물감이 풍경에 어울리는 컬러로 구성되어 있어 꺼내 써 보기는 했는데, 영 낙엽의 색을 맞추기가 쉽지 않았다. 의자도 있고 테이블도 있고 물감도 있었지만 두 시간 쯤 지나가기 시작하니 추위는 둘째 치고 허리가 굳어 아프기 시작했다. 중간에 자꾸 일어나서 움직여줬어야 했는데 채색을 시작하고 나면 초집중 상태가 되는 바람에 움직이는 걸 자꾸 잊는다. 애플워치라도 꼭 차고 나가서 움직여야겠다. 

문제는 10월에 딱 두 번 나갔는데, 벌써 11월이고 집 밖으로 고작 몇 발 자국 걸어 나가는 일도 쉽지 않아서 또 언제 나갈 수 있을지 모르겠다. 날이 따뜻하면 먼지가 많고, 공기가 맑으면 날이 춥고, 뭐 커피 한 잔 정도 사들고 나가는 걸 올 해 안에 두 번 정도 더 할 수 있다면 성공이라 할 수 있겠다. 내년도 있으니까 뭐. 사과꽃과 모과꽃이 활짝 피는 봄을 기다려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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