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OWPPING

수채화 스케치를 하시겠다고 급구매한 중국산 가오몬 라이트박스

d0u0p 2018. 8. 15. 23:05
728x90
반응형

라이트박스라는 미지의 영역의 물건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셀 애니메이션 작업을 해 본 적이 없어서이기도 하지만, 보통 도안 작업을 하거나 양식화 작업을 할 때에는 트레싱 페이퍼나 트레팔지를 주로 사용했었고, 스케치라 함은 원래 본인이 손으로 쓱쓱 그려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지난 봄 우연히 은하철도 999 전시를 보러 갔을 때 라이트 박스를 처음 보게 되었다. 

원래는 르코르뷔지에 전시를 보러 갔었는데, 그 날이 마지막 전시일이어서 사람이 어마무시하게 많았고, 두 시간 대기해서 입장하더라도 전시장 안에 들어가면 줄줄 엮인 굴비 신세가 될 것이 뻔해서 목적했던  전시를 포기하고, 아쉬운 대로 옆에서 하고 있는 다른 전시인 은하철도999전을 보러 들어갔는데 한 쪽에 라이트박스를 놓고 원화를 따라 그려 보는 코너가 준비되어 있었다. 

오랜만에 연필을 쥐고 그림이라는 것을 그리게 되어 신이 났었고, 라이트 박스 위에 올려진 밑그림 위에 종이를 올려 놓으니 밑그림이 너무 잘 보이니까 슥슥 빨리 그릴 수 있어 좋았다. 트레이싱 페이퍼 없이도 이렇게 트레이싱할 수 있는 거였구나 그제서야 깨달았다. 

그렇게 해서 가져 온 기념품이다. 메텔 언니 멋있다. 주옥같은 은하철도999의 명대사들을 곰곰히 되새기며 볼 수 있었던 전시도 좋았다. '꿈은 시간을 배반하지 않고, 시간도 꿈을 배반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공들여 쓰고 있는 이 시간들이 정말 헛된 발걸음이 되는 게 아닌가 종종 의심스럽기도 하지만 마쓰모토 레이지 선생을 일단 믿어 보겠다.  

다녀와서는 한동안 라이트박스를 잊고 지내다가 유투브 콘텐츠에 대한 궁리를 하다 문득 라이트박스가 떠올랐다. 그림을 쉽게 옮겨 그릴 수 있는 방법이었다. 

수채화 연습도 하려니 스케치를 매번 새로 공들여 하는 것이 힘들기도 했고, 심지어 스케치가 잘 안되서 지우개질을 한 곳의 종이가 일어나서 색이 곱게 칠해 지지 않는 것도 고민이어서, 수채화 테크닉 서적을 이리 저리 읽다 보니 스케치할 때 꽃을 버니어 캘리퍼스로 실측해서 비례를 그대로 그리는 법이 있는가 하면, 스케치는 최대한 옅게 하고, 물감 칠할때 연필선을 지우라 하기도 하고, 다른 종이에 그린 스케치를 수채화용지에 옮겨 그리는 방법에 대한 안내도 있었다. 

책에 안내된 방법은 어릴 때 많이 쓰던 방법인 먹지를 대고 스케치를 옮기는 것과 같은 개념이었는데, 스케치 뒷면에 연필로 흑연을 칠한 후 수채화 용지 위에 놓고 스케치를 필사해내는 방법이었다. 그러나, 라이트박스를 쓰면 뒷면에 흑연칠을 하는 번거로운 단계 없이 원하는 꽃을 쉽게 종이에 옮겨 그릴 수 있으니 적당한 시간동안 스케치를 완성하는 동영상을 만들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ASMR이니까, 책에서처럼 뒷면에 슥슥 연필칠을 하는 과정을 넣는것도 괜찮을 것 같기는 하지만, 한 번이면 몰라도 늘 뒷면을 칠하는 영상을 만들어 올리는 것도 이상하거니와, 매번 칠하자면 분명 번거로울 것이다. 빠르고 쉽게 양질의 결과물을 얻기 위해서는 라이트박스를 사용하는 것이 효과적이지 않을까, 다만, 전시장에서 보았던 뭉툭하고 덩치 큰 구식 박스 말고, 좁은 책상에서도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제품을 찾겠다며 검색을 해 보니, 저렴한 가격에 살 수 있는 중국 가전제품 브랜드의 라이트박스를 찾게 되었고, 박스라기 보다는 패드에 가깝게 슬림한 형태에 적당히 트렌디한 디자인으로 만들어 놓은 제품을 약 5분 정도 고민하다가 구매했다. 

수채화 연습용으로 쓸 꽃 밑그림을 아이패드로 만들어 놓고 있는데, 꽃 사진은 우선 직접 촬영해서 사용하고, 촬영한 사진을 스케치앱으로 트레이싱해서 PDF로 만들어 나중에 인쇄해서 수채화기법서 설명대로 뒷면에 흑연칠을 해서다시 트레이싱해서 쓸 예정이었다. 

막상 라이트박스를 사려고 보니, 아이패드에서 그려진 그림 위에 종이를 얹으면 라이트박스랑 똑같이 쓸 수 있지 않을까 궁금했다. 라이트박스를 사서 쓰는 거나, 아이패드 위에 종이 얹어 그리는거나 마찬가지라면 굳이 살 필요는 없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렴하기도 하고 사이즈가 일단 A3까지 가능하고 발열 없는 LED를 사용하며 얇기까지 하니, 밑져야 본전이겠다 싶어서 일단 구매를 했다. 

중국에서 왔는데, 생각보다는 빨리 왔고 패키지를 열었을 때에는 이게 무슨 잡동쓰레기를 넣어보냈냐 싶을 정도로 사은품같지 않은 사은품들이 끼워져, 아니 널브러져 있어서 어금니를 한 번 꽉 깨물고, 쓰지 않을 것들은 걸러냈다. 조잡한 집게들과 구겨진 트레이싱 페이퍼, 2B연필 두 자루, 그림 그릴 때 사용하는 장갑, 쓸 데 없는 휴대용 USB조명 두 개 중 조명은 팀장님 드렸고, 연필은 책상 위에 두었다. 

제일 중요한 건 아이패드와 비교해서 얼마나 밝으며 얼마나 밑그림을 잘 비춰주는지 궁금해서 집에 오자 마자 확인해 보았다. 

오른쪽이 라이트박스이고, 왼쪽이 아이패드인데, 아이패드는 밝기를 최대로 하고 나이트쉬프트도 꺼 둔 상태인데도 약간 노랗게 보이고 확실히 덜 밝다. 게다가 아이패드 요즘 뭐가 문제인지 원래 그랬는데 자주 안써서 몰랐었는지 배터리도 빨리 닳고, 가끔 발열이 심할 때도 있다. 그에 비하면 안정적이고 넓고 훨씬 안정적인 전원 공급 상태에서 라이트박스를 사용하는 것이니 잘 샀다. 

실제 작업은 아직 안해봤지만 이정도면 일단 합격, 잘 샀다, 잘 샀어, 문제는 아무리 발열이 없는 LED라지만 이런 최고, 최장의 무더위 속에서 등을 켜고 뭔가 작업을 하는 일은 극기가 필요한 일인 것이다. 시냅스도 녹아내릴 것 같은 더위에 뜨끈한 노트북 앞에 앉아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너무 곤욕스럽다. 

뭐, 환갑 쯤에 대성하면 되니까 차근 차근 천천히 하자. 

더우면 쉬어야지.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