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INGKING

비가 오던 날, 인텔리젠시아 서촌

d0u0p 2024. 6. 21. 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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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가 따뜻해지면서부터 힘차게 나들이를 다녔더니 포스팅할 내용이 산더미처럼 쌓였음은 물론이거니와 밀려버린 그 날의 기억들이 너무 희미해져서 거의 소설 수준으로 작성해야 할 지경이다. 

그 날은 그랬다. 휴일이었고, 비가 꽤 많이 내렸다. 날씨와는 상관없이 약속을 잡았고 비가 많이 내린다면 오히려 새로 생긴 핫 스팟인 인텔리젠시아 서촌에는 오히려 손님이 적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으로 (심지어 포스팅할 엄두조차 하지 않아서 못한)광화문 무탄에서 묵직하게 점심을 먹고는 빗 속을 뚫고 서촌까지 걸어가 보았다. 

그동안 한 번도 걸어가 본 적이 없는 광화문 무탄에서 인텔리젠시아 서촌까지 가는 샛길은 비가 와서인지 공휴일이라서인지 인적이 드물었지만 멀리 보이는 산자락을 지표 삼아 걸어가는 그 길이 오히려 한적하고 좋았다. 비가 그렇게 오는데 한적하지도 않고 북적였다면 또 얼마나 심기가 불편했겠나 싶기도 하다. 

서촌의 큰 길 앞에 도착할 무렵에는 오가는 사람들이 꽤 보였지만 인텔리젠시아 근처에 도착했을 무렵 멀리서 보기에는 인텔리젠시아 앞에는 대기가 그렇게 많아 보이지 않았다. 거의 입구에 닿았을 때 쯤 대기라인 표지판과 함께 비를 피할 수 있는 안 쪽 공간을 가득 메워 대기중이신 분들을 발견하기는 했는데, 그래도 이 정도면 비 때문에 선방하지 않았나 싶어서 비를 뚫고 걸어온 끈기를 살려 기다리기로 했다. 

공간이 넓지 않아서 좌석이 많지 않으니 이미 자리를 차지하신 분들이 일어나시기 전까지는 어쨌거나 저쨌거나 하염없이 기다려야 하는 상황이었지만 어느 새 주문 직전에 다다를 수 있었다. 

한동안은 계속 이렇게 손님이 많을테니 일단 과감하게 궁금한 메뉴들을 주문했다. 시그니처라고 하는 얼터너티브 에스프레소는 원두를 선택해야 했었는데 아마도 페루 레호 버번을 주문했던 것 같고, 사무실에서 근 1년을 묵히다가 내려 마시고 있는 인텔리젠시아의 블랙캣 디카페인 원두의 맛이 멀쩡한 상태였던 것인지 궁금해서 디카페인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주문했다. 

이미 썼듯이 그 날의 희미했던 기억을 다시 끄집어내는 중인데 원두의 맛이 세세하게 기억이 날 리가 없다. 버번이 버번이라는 이름보다는 덜 버번같은 느낌이었던 것 같은데 새콤함이 더 먼저 강하게 치고 들어와서 그랬던 것 같고, 물을 섞은 메뉴가 조금 더 흐리니까 먼저 마시라고 권하신대로 먼저 맛을 보았던 디카페인 아이스 아메리카노는 사무실에서 마셨던 그 오래된 원두가 꽤 멀쩡한 상태였음을 확인하게 해 주었다. 그냥 내동댕이쳐 두었던 패키지에 들어 있는 놈들도 멀쩡한지 꺼내서 마셔봐야겠다. 

그러나 이 설명서에 적힌 글에서 상상할 수 있는 맛과는 약간 거리가 멀다. 코코아와 사과의 맛이라고 하면 코코아의 단 내와 사과의 단 내가 반반 섞인 느낌일 것 같은데 코코아의 텁텁함과 덜 익은 사과의 떫은 맛을 섞은 느낌과 더 비슷하다고나 할까, 원래 그 과일향이네, 복숭아향이네, 하는 커피 아로마에 대한 설명들이 한국 과일이 기준이 아니라 그들의 과일이 가진 시금털털한 맛에 가깝다고 어디에선가 읽은 것 같기는 하다. 

메뉴에 있는 시그니처 드링크 중에 탄산이 들어 있다는 블랙캣 핏츠나 사케라또가 궁금하기는 한데, 또 언제 가서 줄을 설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일단 구석에 쳐박아둔 원두나 꺼내 털어 마셔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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