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RITING

필기계 : 만년필 구매기

d0u0p 2018. 5. 5. 23:48
728x90
반응형

문구계가 아닌 필기계를 파야겠다고 생각하고 필기용 스타일시트를 준비해 보았다.

요즘 필기에 적용되고 있는 펜과 잉크색상 스타일 시트

이걸 준비한 이후로 프로젝트 마무리 기간에 걸려서 필기를 중단할 수 밖에 없었는데, 다시 새 프로젝트가 시작되어서 다시 손대지 못하고 있다. 벌써 5월이고, 곧 사전공고 날 타이밍인데 올해는 이미 망한 느낌이다. 

한국으로 돌아온 가족들과 시간 보내는 것도 즐거운 일이고 일하면서 돈 버는 것도 적당히 적응하고 있고, 월급이 있으니 마음이 여유로워져서 그림도 그리기 시작했고 따라서 책은 자연스럽게 멀어져 가고 있다. 프로젝트 시안 초기 작업만 종료되는 대로 다시 꼭 펜을 잡아야겠다. 

필기에 많이 사용하는 만년필 중 제일 처음 샀던 만년필은 카베코 스포츠이다. 우연히 자주 가는 문구용품 사이트에서 광고 이미지에 혹해 사 보았던 것이었는데 필기감이 좋아서 꾸준히 오래 쓰고 있다. 터쿼즈와 바이올렛 컬러의 카트리지에 혹해서 구매하게 되었고, 독일 여행갔을 때 꽤 분주하게 카베코를 찾아 다녔었다. 일반 문구점에서 쉽게 만나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문구점도 규모가 어느 정도 있어야 카베코를 찾아볼 수 있었다. 친구네 동네에서는 아예 찾아볼 수 없었고, 주변의 약간 큰 소도시로 매장을 찾아 갔었는데 그 곳은 카베코와 디자인 문구를 전문으로 하는 작은 매장이었고 카드 결제가 안되는 곳이라 원하는 만큼 살 수가 없었다. 적당히 3개짜리 펜케이스와 선물용 만년필을 구매하고 와서도 성에 차지 않아 쾰른에 갔을 때 다시 카베코를 파는 매장을 수소문했다. 호텔 근처 문구숍은 일반적인 문구용품들과 라미는 많이 있었는데 카베코는 볼 수 없어서, 아마 친구가 취급 매장 위치를 검색해서 주소를 주었고 걸어갈 만한 거리라 찾아갔던 것 같다. 다행히 쾰른 역 근처였고, 쾰른의 유명한 오 드 코롱 (= 쾰른의 물) 471 근처의 큰 쇼핑몰 한 쪽에 문구 코너가 있고 그곳에 카베코가 있었다. 그 때까지만 해도 몽블랑 엄두도 못내고 생각도 해 본적이 없어서 열심히 카베코만 찾아 다녔다. 그 곳에서 펜 파우치를 하나 더 샀고, 동으로 된 바디의 만년필을 하나 더 샀다. 문제는 그 때 구매한 동 만년필이 작년부터 뭐가 문제인지 흐름이 계속 끊겨서 나를 힘들게 하고 있다. 그 이후로 눈을 돌려서 다른 만년필을 찾고 있는 상황인데, 카베코 신제품이 나오면서 어디에선가 얼핏 카베코의 고질적인 문제인 흐름이 개선된 제품이라고 한  내용을 본 적이 있다. 그러나 아직 카베코 페르케오는 사지 않고 있다. 눈으로 직접 만나게 되면 사려고 기다리고 있는데 아직 눈에 띄지 않는다. 

상단 얇고 굵기가 일정하지 않은 부분이 데시모EF, 하단은 카베코 스포츠 EF

그 이후에 혹했던 만년필이 파이로트의 데시모였고, 일본 여행하러 간 김에 우여곡절 끝에 샀다. 일반 볼펜도 캡 방식보다는 노크식을 선호하는 나에게는 카베코의 트위스트캡이 여간 번거로웠던 것이 아니다. 그래서 노크식 만년필이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신세계를 발견한 느낌이었는데 그 때까지는 만년필의 가격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는데 데시모의 가격부터 시작해서 천차만별 가격의 다양한 만년필에 눈을 뜨게 되었다. 문방구에서 일이천원 주고 사는 펜이 아니라는 데에 약간 망설였고 바로 구매하지는 않았다. 그러다가 후에 일본 여행을 가게 되어 조금이라도 저렴하지 않겠나 싶어 데시모를 찾아 보았다.  그러나 데시모를 취급하는 매장도 역시 일반 문구점이 아니라 만년필을 전문으로 취급하는 매장이었고 비루한 체력으로 여행하느라 전문 매장을 일부러 찾아 가기는 쉽지 않았다. 가까운 곳에 위치한 로프트에는 일반적인 만년필과 잉크만 있어서 잉크만 저렴한 가격이라 사고, 결국 다음 날 아침 데시모가 눈에 아른 거려 누운채로 한국 쇼핑몰에서 주문하게 되었다. 그냥 한국에서 주문해 놓고 집에 가서 쓰자고 가뿐하게 포기하고 그날 돌아다니는데 우연히 만년필 전문 매장을 만나게 되어 속이 좀 쓰렸지만, 만년필샵을 만난 김에 동생 선물용으로 한 자루를 더 사왔다. 금촉이지만  ef 촉이라 그런지 일년 넘게 사용중인데도 만년필과 서먹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딱 맞는 궁합을 못 찾은 것인지 촉이 가늘어서인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 동생에게 준것이 f 촉이기 때문에 촉을 바꾸면 어떤 느낌일지 궁금하기도 하고 동생은 흥미없어 하는 것 같아서 지금 다시 가져와야 하나, 줬다 뺐기 있기 없기인가 고민 중이다. 

그리고 나서 한동안 딥펜을 쓰면서 딥펜으로 글씨쓰기 수업을 듣게 되었었다. 그 때 선생이 가진 만년필 중에 오래된 파커의 만년필을 보고 또 혹했다. 닙이 짧고 숨겨져 있어서 잉크가 잘 마르지 않고, 오래 전에 인기를 끌었다가 이제는 더 이상 나오지 않는 모델이라고 했다. 중고나 경매로 구매해야 한다는데 그 모델에 대한 특성을 잘 모르고 사면 실패할 가능성이 커서 공부가 좀 필요하다고 했다. 구하기 쉽지도 않고 공부까지 필요하다니 더 이상 쳐다보지 않기로 했다. 대신 중국 국가 공인 만년필 브랜드인 영웅에서 비슷한 모델을 만들어 싸게 팔고 있다는 걸 알게 됬고, 그래서 밑져야 본전인 셈으로 6,000원을 내고 주문해 보았다. 실제로 중국에서 구매하면 2-3,000원에 구매할 수 있다고 하지만 사려고 하던 때에는 중국 갈 일이 없을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에 얼마 비싼 것도 아니라 재미삼아 주문했었는데, 생각보다 필기감이 너무 좋았다. 

굵은 폰트가 영웅616+파카큉크, 얇은 부분은 유니볼-시그노DX, 길바닥에서 필기한 느낌이지만 사실 길이 내다 보이는 카페이다.

다만 잉크 저장부가 별도로 분리되지 않는데다가 뽁뽁 눌러서 잉크를 주입하는 형태라 잉크가 많이 들어가지 않는다. 그게 제일 아쉬운 점이고, 잉크에 따라 필기 느낌이 달라져서 물처럼 흐르는 느낌이 강한 이로시주쿠와 까렌다쉬 잉크를 넣으면 서걱한 느낌이 강하고 색이 짙게 표현되지 않아서 갑갑한 느낌이 있다. 파카 큉크를 넣었을 때가 제일 느낌이 좋지만 큉크는 색이 다양하지 않아 필기에 사용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한국 온라인 쇼핑몰에서 구매한 모델은 616이었고, 나중에 북경에 놀러 갔을 때 동생에게 저렴한 영웅 만년필 구경이나 좀 하게 까르푸나 문구점 좀 데려가 달라고 하였으나 동생은 그냥 인터넷으로 사는게 낫다며 지 맘대로 애매한 만년필을 주문해 주었다. 내가 원하는 모델도 아닌 것들을 두 자루나 잉크와 함께 세트로 안겨 주어서 나를 당황시켰다. 내가 보겠다는 저렴한 모델은 한국에서도 싼 제품이니까 그냥 한국에서 사라며, 약간 상위 모델을 사줬는데, 처음에는 굵직해도 그럭저럭 쓸만 한가 싶었지만 역시나 캡이 말썽이어서, 몇 일만 안 쓰고 방치하면 바로 말라 비틀어져서 쓰기 힘들었다. 유격이 있고, 열고 닫을 때 이미 덜컥대는 느낌이 좋지 않았다. 그 제품 말고 라미를 카피한 제품은 조카가 써 보고 싶다 하여 재미삼아 써 보라고 주고 왔다. 영웅은 국가 공인 브랜드라 하지만 기본적으로 만드는 제품들은 대부분 이미 있는 다른 브랜드의 제품을 카피해 만든 것이 많다. 지적재산권이나 디자인권에 대한 개념은 그냥 밥 말아 드신 느낌인데, 라미 제품 같은 경우는 라미 제품 공급업체가 마음에 들지 않아 보복삼아 카피해서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써 본 영웅 제품 중에는 616이 제일 훌륭한가보다. 가성비로는 더 이상의 만년필은 없을 것 같다.

덧붙이자면 사촌동생이 혹해서 영웅을 알리로 구매했는데 짝퉁이 왔다. 그렇게 싼 만년필도 더 싼 짝퉁이 있을 수가 있다니 놀라운 일이다.

까렌다쉬 849 + 까렌다쉬 디바인 핑크, 이렇게 쓰면 디바인 핑크가 처음엔 묽고 밝게 나오는데 조금 지나면 어두운 적갈색으로 발색된다.

영웅 이후에는 캘리그라피펜들과 딥펜에 빠져 있다가 새롭게 일을 시작하게 된 곳이 하필이면 남대문 수입상가 근처라 아침에 사무실에서 노트를 하던 중 카트리지를 챙겨오지 않았는데 잉크가 마침 똑 떨어졌고, 수입상가에 혹시 카트리지를 팔까 싶어 점심 시간에 찾아갔었다. 그리고 그 곳에서 강경화 장관의 만년필로 유명해진(?) 까렌다쉬 849를 만나서 바로 포장해 오게 되었다. 까렌다쉬849와 카베코 스포츠가 눈에 보이면 시필해 보고 사 볼까 생각은 하고 있던 차였고, 카트리지를 사러 간 매장에 하필 까렌다쉬 849가 떡하니 시필용으로 나와 있어서 써 보고 바로 샀다. 그 동안 시필용으로 여러 군데에서 보기는 했는데 대부분 관리가 엉망이어서 잉크가 떡져 있거나 캡이 엉망이거나 등등 여러 가지로 부정적인 이미지를 형성하게 했었고 제대로 시필이라 할 만한 시필을 할 기회가 없었기 때문에 구매를 망설인 것도 있다. 지금은 뽑기를 잘 못 한 느낌도 있긴 한데 처음 쓸 때부터 닙을 정확히 바로 뉘여 사용하면 잉크가 잘 나오지 않았다. 이게 만년필 쓰기의 정석 각도인데 잉크가 잘 나오지 않아서 당황했다가 이제는 살짝 각도를 바꿔 사용중인데 흐름도 좋고 굵기도 딱 마음에 들어서 각도를 튼 채로 잘 사용하고 있다. 까렌다쉬 모델 중에도 닙에 문제가 있는 만년필이 있다는 블로그를 본 적이 있어서 총체적인 문제일 수도 있지 않나 싶지만, 동일한 모델의 다른 펜을 시필용 외에는 써 본 적이 없어서 원래 해당 모델이 갖고 있는 문제인지 하필 내가 산 모델만 문제인건지는 알 수 없다. 일단은 잘 쓰고 있고 이대로도 꽤 마음에 들지만 종종 필기를 하고 있노라면 그립 상단부가 헛바퀴 돌아서 자주 풀려서 불편하다. 

그리고, 어제 새로 나온 몽블랑 어린왕자 모델을 사면 사은품을 준다며 나를 유혹하는 문자를 어제 받았다. 

그럼 이제, 몽블랑이 남은건가? 



반응형